2020년 치매극복의 날 기념 치매극복수기공모전 '장려상' 입상작입니다.

 제목 : 복 많은 35년생 돼지띠 할머니   

팔십오세 할머니가 지팡이도 아닌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갑니다.

멋모르는 사람은 “저 할망구 경로당 가면서 무슨 책가방이야” 할 테지만 나는 성동구치매안심센터에 기억지킴학교 학생입니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도 다니고 있습니다. 늙었다고 학교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성경공부와 기도를 하는 성당에서 어르신 대학을 다닐 때 기억지킴학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우리 성당의 어르신대학에 치매검사를 하러 치매안심센터 선생님들이 오시는데,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여 가장 앞줄에 앉아 교육도 듣고 검사도 받았습니다.

2019년에 기억지킴학교를 알게 되어, 바로 신청하고 교우들에게 같이 공부하자며

한껏 들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르신대학 교우들과 함께 등교한 2019년 7월 12일! 지금도 생생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머리를 손질하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주름진 얼굴이 그날은 웬일인지 환해 보였습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옷과 신발을 골라신고 학교로 부지런히 걸어서 등교를 하니

교육은 오전 10시인데 9시도 되지 않아 일찍 도착하여 교실 앞에서 대기 합니다.

겉모습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 학교에 입학한 첫날이 자꾸 떠올라 입가에 웃음꽃이 피어오릅니다.

수업 시간이 다 되어 봉사하는 분들의 안내를 받으며 교실로 들어갑니다.

교실 한켠 책꽂이에는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는 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고를 수 있는 필사집, 그림 색칠하기 등등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활동할 수 있는 자율학습 시간을 보내고 나면 치매예방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는 순간 모든 교재와 필기류에 나의 이름이 모두 적혀있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찡~ 해옵니다.

오랜 시간 누구의 엄마, 할머니로 불리느라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이름이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가슴 벅찬 감동으로 밀려옵니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기쁜 마음에 공부할 준비를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책을 펼쳐 보니 어색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문제가 나와서 질문을 하려고 보니 어려서나 늙어서나 여전히 부끄럽습니다.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용기를 내어 선생님에게 물어보면, 온화한 표정으로 가만가만 알려 주십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처럼 배려로 알려주시니 자꾸만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10명의 어르신들과 함께 체조를 하는 시간에는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즐겁고 행복합니다. 체조의 동작과 순서를 익힌 후에는 교실에 있는 사람 순서대로 자기 번호의 동작을 정하고 기억합니다.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외운 것을

발표합니다.

처음에는 동작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어려웠는데, 반복할수록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서 내 순서에 발표를 하면 자신감도 생기고 어렵기만 했던 동작들이 하나씩 머릿속으로 들어와 점점 기억력도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은 몸만 움직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머리로 동작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치매예방활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업은 기억을 살리기 위한 낱말과 그림을 이용해서 문장을 만들어 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해야 하는 숙제도 내주십니다.

어떤 숙제냐면, 오늘 배운 내용을 잊지 않고 다음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수업과 숙제가 기억을 살리는 데 효과가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그냥 따라 해보았습니다. 숙제를 마치고 책가방으로 사용할 가방, 책, 필통, 지우개를 챙기다 보니 정말 학생이 된 것만 같아 하루하루가 새로웠습니다.

기억지킴학교는 손으로 만드는 수업도 많이 합니다. 허브식물을 화분에 옮겨심고 식물에 이름도 짓고 집으로 돌아가서 동물을 키우듯이 하루하루 커가는 기특한 식물에 적적했던 방구석을 환하게 밝혀 주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위해 치매예방에 좋다는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십니다.

저에게는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는데 교육을 받다 보면 자꾸 동생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좋은 걸 동생도 같이 하면 좋겠다’ 싶어서 등록을 하고, 할머니 자매가 나란히 등하교를 하면, 앳된 얼굴에 교복을 입은 동생과 손잡고 등교하던 시절이 떠올라 또 한 번 좋은 추억에 행복해집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치매예방활동 교재로 나누어 주신 ‘나의 기억지킴일기’ 쓰는 방법을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배우고 5개월 동안 실천했던 식단관리와 걷기, 활동일기 등의 기록을 혼자 쓸 수 있게 훈련하고 치매안심센터 선생님과 상담하며 관리받던 시간이 큰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끊이지 않는 코로나 확진자로 외출도 어렵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요즘은 기억지킴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트에 하나하나 적어봅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노인입니다.

성당도 못 나가고, 외출도 어려운 요즘 같은 시절에 내가 받은 기억지킴학교 교육은

일상에 활력을 주는 좋은 습관과 기회를 주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체조, 치매예방에 도움이 되는 걷기, 식단관리의 중요성을

설명하던 선생님을 떠올리며, 매일 빠뜨리지 않으려고 오늘도 지킴일기를 씁니다.

무엇보다 치매를 예방하고 싶다는 바램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는 이 좋은 교육을 성동구의 모든 노인들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요즘 같은 때에는 혼자 있는 노인들도 매일 기도처럼 실천하여 치매에서 해방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시기일수록 노인들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모두 건강하기를 빕니다.